지역감정의 창시자? 킹메이커 시리즈 2탄! 엄창록
배경
함경북도 경성군 출생.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심리전 담당 하사관으로 복무. 군 복무 때 요제프 괴벨스와 마오쩌둥의 심리전술을 익힌 것으로 알려짐. 전쟁이 끝난 뒤 강원도 인제에서 약방을 운영
김대중은 1959년 재보궐선거,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인제군 지역에 출마했지만 낙선했음. 엄창록과 만난 이후 1961년 재보궐 선거에서 처음으로 당선. 이후 김대중의 비서로 계속 조직을 담당
활약
1967년 제7대 총선
박정희 정권은 목포를 특별지역구로 지목해 김대중의 당선을 막고자 정권 차원에서 금품 살포, 투개표 조작, 불법적인 유권자 매수행위 등 총력을 다했음
엄창록은 여당의 부정행위를 역이용
- 여당 선거운동원인 척하면서 거만한 태도를 취하기
- 여당 당원으로 위장해 양담배를 건네며 위화감 조성
- 적은 돈을 넣은 봉투를 여당 이름으로 돌리기
- 차를 타고 다니면서 욕을 퍼붓고 상대방 캠프를 대기
- 여당 후보 이름으로 유권자 수백 명을 음식점에 초청했다가 안 나타나기
- 여당 후보 이름으로 고무신을 돌렸다가 주소 잘못이라며 회수
- 피켓을 이용하는 선거 처음 도입
- 대문에 O,X표를 해놓고 여당이 시민들을 감시한다고 소문
- 유권자 집에서 세수를 하는 척하면서 고급비누 놓고 가기
관권 부정선거가 횡행했던 당시에는 야당이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계책이었단 평가가 있음. 또한 상대 후보 표를 깎는데 드는 비용이 내 표를 얻는 데 비해 1/10밖에 들지 않으므로 상대표를 깎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
1971년 제7대 대선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
신민당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영삼은 당시 일반적인 선거전략에 따라 지구당 위원장들을 공략하는 데 집중, 원내 세력이 약했던 김대중은 대의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밑바닥을 공략하는 전략을 시행하여 불리했던 여론을 뒤집어 경선에 승리
‘두더지 작전’
선거 조직원들이 제대로 활동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한 지역에 본래 대의원이 5명뿐인데도 가공의 대의원을 집어넣어 6명으로 명단을 만든 뒤 이를 조직원에게 넘겨줌. 사후 보고 과정에서 가공인물 1명을 찾아낸 조직원은 제대로 활동한 것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 활동지는 조직원의 연고지를 피해 지정
‘최초의 점조직 선거 활용’
이른바 ‘1·3·5조직’. 한 명이 3명을 만들고 3명이 5명을 만드는 조직원 확대 작업. 조직책이 대의원을 접촉한 뒤에는 심사반을 투입해 대의원에게 ‘후보 친척’으로 위장해 조직책의 활동 내역을 점검. 불성실하다고 평가된 이는 활동비를 줄이거나 교체하는 등 철저히 관리
대통령 선거 본선
향토예비군제 폐지, 남북교류와 평화통일 등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획기적인 공약 제시. 또 김대중의 경제정책을 그의 이름을 따 ‘대중경제론’이라고 이름 붙여 유권자에게 각인화 시도
지역갈등 설계자?
박정희 정권은 엄창록을 확보하기 위한 작전을 펼침. 1971년 1월 27일 발생한 김대중 자택 폭발물 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김대중의 비서들을 연행했고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엄창록은 가족까지 조사를 하는 압박 끝에 김대중과 결별하고 박정희의 선거를 돕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음
중정에서 돌아온 엄창록은 4·27대선을 열흘 앞두고 4월 16일부터 김대중 측 참모회의에 참석하지 않음. 그리고 이와 맞물려 영남지역에 전단지가 살포됨.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영남에 뺏긴 대통령 호남인이 찾아오자 From 호남향우회”란 내용의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문구가 담김. 또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건을 사지 않기로 했다’는 식의 흑색선전이 영남지역에서 나돌기도 했음. 이에 자극받은 영남 표심이 박정희에게 몰렸음
1971년 대선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지역감정이 엄창록의 작품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음. 김대중 진영에서 굳이 영남 유권자의 정서를 자극하는 자충수를 둘 이유가 없었다는 것. 이전에도 김대중이 ‘호남 푸대접론’을 제기한 적은 있었지만 호남지역 유세에 국한했을 뿐이었음
엔딩
엄창록은 대선이 끝난 뒤 한 달 여 만에 다시 나타났지만, 김대중을 찾아가지 않았고 이후 두 사람은 끝내 다시 만난 적이 없음
1987년엔 안기부가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키려고 엄창록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기도 했지만 당시 엄창록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모두 출마하니 자신이 개입할 필요도 없다며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있음. 1988년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
엄창록은 "정보부에 회유된 것도 아니고, 그들을 위해 일하지도 않았다."고 강력히 부정했고, 당시 정보부 간부들 역시 "엄창록을 회유하는데는 성공했으나, 활용도는 없었다."라고 증언. 반면 "지역감정 조장정책은 분명히 엄창록의 아이디어였다."는 증언도 있음
엄창록은 김대중을 처음 만나 “공화당의 선거운동은 법을 어기는 범죄 바로 그것입니다. 공무원을 동원해 돈 봉투를 살포하고, 투·개표 조작까지 멋대로 합니다. 관권, 금권에 대응하지 않으면 야당은 정치적으로 살길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