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합작운동(1946.5∼1947.12)은 해방정국에서 좌파, 우파 세력 등, 사상을 넘어서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음
배경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한다고 결정. 신탁통치안에 대해 찬탁과 반탁을 놓고 좌·우세력이 크게 대립하였음. 이듬해에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통일 임시정부에 대한 입장차이로 결렬. 이후 이승만은 남한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전북 정읍에서 연설을 하게 되는데,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라고 언급. 단독정부 수립 문제 등 좌,우 세력 간의 갈등이 격화
북한 지역에서는 초기에는 조선민주당(조만식)의 주도로 광범한 반탁운동이 전개되었고, 처음에는 반탁이었으나 이후 찬탁으로 기울면서 반탁 진영은 숙청되거나 월남하였음. 남한 지역에서는 우익은 반탁으로 좌익은 찬탁으로 기울게 되어 갈등이 지속
당시 남쪽의 정치 계파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이승만 / 우파 / 신탁 반대 / 남한 단독정부
- 한국민주당 / 김성수, 송진우 / 우파 / 신탁 반대 / 남한 단독정부
- 한국독립당 / 김구, 임정계열 / 우파 / 신탁 반대 / 남북 통일정부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 중도 / 신탁 입장 유보 / 남북 통일정부
- 조선민족혁명당 / 김원봉 / 좌파 / 신탁 찬성 / 남북 통일정부
- 조선공산당 / 박헌영 / 좌파 / 신탁 찬성 / 남북통일 정부
구성
좌우 대립이 격화되면서 미소공동위원회에서 결론이 안난다면 결국은 분단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낀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파 인사들이 주도하여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를 수립하고, 위원장에 김규식을 선출. 구성원으로는 중도 우파 계열에는 김규식, 안재홍, 원세훈, 최동오, 김붕준, 김약수 등 인사들이, 중도 좌파 계열에는 여운형, 허헌, 성주식, 장건상, 이영, 정노식, 정백, 이강국 등. 정작 핵심 합작 대상인 이승만 및 한민당과 공산당은 참여하지 않음
1946년 10월에 좌우합작 7원칙을 합의
-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 미국-소련 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여 시가지의 기지와 대건물을 적정처리하며, 주요산업을 국유화하여 사회 노동법령과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고, 통화 및 민생문제 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완수에 매진할 것
-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의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서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익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출판, 교통, 투표 등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미군정의 지원
좌우합작 7원칙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미군정은 좌우합작에 간접적인 지원.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 김구와 이승만은 열렬한 반탁운동을 하게 되었고, 미군정은 이들을 극우세력으로 보아 신뢰하지 않음. 더불어 미군정이 주선한 우익계열만의 정치개편은 이미 한계를 드러낸 상황으로 판단. 그 결과 새로운 방도를 모색하기 위해 중도파 정치인사 여운형과 김규식 지지로 돌아서게 되었음. 이러한 미군정의 지원에 1946년 12월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미군정의 과도 입법기구)이 구성되어 1946년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합리적이고 중도적인 좌우세력을 결집시키는 좌우합작이 전면에 급부상
진행
- 국내 우파 입장
좌우합작운동에 대해서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과 신한민족당은 공식적으로 지지를 나타냈었으나 내부에 반대 의견도 있어 김구의 입장은 적극 참여하기보다는 관망하는 자세였음. 이승만 역시도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했으며, 친일파세력과 김성수를 비롯한 동아일보 계열의 한민당도 좌우합작운동은 한민당의 몰락을 의미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부정적
- 국내 좌파 입장
박헌영과 조선 공산당 등을 비롯한 공산당계열 역시 중도파에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음. 미군정의 공산주의계열 탄압과 공산당 간부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령이 본격화 되어가자, 공산당 역시 급진화 되어가면서 미군정과 정면충돌. 이때문에 공산당계열은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미군정과 연탁한 기회주의자'라며 부정적
- 미국 상황
1947년 무렵에는 미국 정가에서는 소련과의 협력무드가 깨졌고, 뒤이어 매카시즘 열풍이 불면서 미국의 대한정책도 반공노선으로 급선회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7년 5월 21일에 제2차 미소공위가 재개. 좌우합작위원회는 '합작 7원칙'에 명시된 바와 같이 우리의 최대목표인 공위가 재개되었으므로 "최속기간 내에 통일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성취하자"는 성명서를 발표
결말
냉전 체제가 심화되자 미군정은 1947년 3월에 좌우합작운동 지원약속을 철회하고 우익 세력을 옹호. 좌우합작운동은 이후 중도세력들만의 운동으로 축소. 좌우의 대립이 더욱 극심해지면서 중도파 인사들은 수 차례 극우세력과 극좌세력으로부터 신변의 테러와 위협을 당함. 이어서 7월 19일에는 좌우합작 운동의 구심점 역할이자, 중도좌파세력들의 중심 인물인 여운형이 암살되어 좌우합작운동은 구심점을 잃어버림. 이어서 10월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마저 결렬되어버리면서 미국이 결국 한반도 문제를 UN으로 이관. 1947년 12월 10일에 좌우합작위원회는 공식해체되어 실패로 끝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