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을 만든 당이 왜 대통령 탄핵에 참여하게 됐을까?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전조 현상? 어떤 일이 있었나

 

 

최근 여권 내부 갈등을 두고 김민석 대표는 "2004년 노무현 탄핵 전조와 비슷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때 국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아는 실무자는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당시 상황을 이해하려면 탄핵 표결만 볼 것이 아니라, 민주당의 분열, 열린우리당의 등장, 총선을 앞둔 여야 대치, 국회의 탄핵 의결과 이후 총선 결과까지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이미 20여 년 전의 일이지만, 당시 정국을 직접 경험한 정치권 선배들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기억입니다. 선배들과 이야기할 때 소외되지 않도록, 지금과 비교해서 알아야할 배경을 핵심만 정리했습니다.


당시 여당은 왜 갈라졌나

탄핵을 이해하려면 ‘왜 대통령의 당이 국회에서 소수가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분열은 2003년에 갑자기 터진 것이 아니라, 2002년 대선 과정부터 쌓인 갈등이 순차적으로 폭발한 결과입니다.

 

1. 갈등의 뿌리: 국민경선이 만든 '이질적 후보'

구조적 배경

  • 새천년민주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만든 정당. 당의 실질적 주도권은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한 구주류에 있었음
  • 그런데 2002년 국민참여경선제(당원+일반국민 참여)가 처음 도입되면서, 당 조직의 지지를 받지 못한 노무현이 후보로 선출됨

💁‍♂️ 후보의 정당성은 '국민'에게서 나왔는데, 당의 권력은 여전히 '조직'이 쥐고 있는 상태

 

2. 1차 충돌: 후단협 (2002년 10월)

상황

  • 2002년 6·13 지방선거, 8·8 재보선에서 민주당 연패
  • 9월 17일 정몽준 대선 출마 선언 → 노무현 후보 지지율 급락
  • 당내에서 공공연히 '후보 교체론' 분출

후단협(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 결성

  • 2002년 10월 4일, 민주당 의원 30여 명이 결성
  • 표면상 명분은 ‘정몽준과의 단일화’, 실질은 노무현의 후보직 사퇴 종용
  • 결성 후 민주당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림 - 후단협 참여 의원 중 17명은 아예 탈당
  • 일부(김원길·박상규·원유철 등)는 단일화가 아니라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으로 이동

경과

  • 11월 3일 노무현 후보가 역으로 단일화를 공식 제안 → 11월 16일 여론조사 단일화 합의 → 노무현 승리
  • 그러나 정몽준은 투표 전날 지지를 철회
  • 결과적으로 대선은 이겼지만, ‘당이 자기 후보를 끌어내리려 했다’는 기억이 친노 진영에 각인됨

 

3. 승리했지만 봉합되지 않은 갈등 (2003년 상반기)

구도

  • 권력은 청와대로, 하지만 당은 여전히 구주류가 장악
  • 2003년 초는 이른바 '허니문 시기'. 구주류는 ‘대통령에게 소외받는다’는 불만을 표하는 수준이었고, 청와대도 당내 인사를 만찬에 초청하는 등 봉합 가능성이 있었음

그러나 당의 개혁 방향을 두고 구주류와 신주류의 갈등이 심화

  • 대선 승리 이후 당내에서는 노 대통령과 가까운 신주류·개혁파가 힘을 얻었고, 기존 동교동계와 구주류는 당의 전통과 조직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 강했음
  • 갈등의 핵심은 단순히 ‘누가 당권을 잡느냐’만이 아니었음. 신주류는 민주당을 그대로 유지하는 수준을 넘어 전국정당화, 상향식 공천, 중앙당 축소, 새로운 참여정당 모델 등을 내세우며 신당 창당 또는 당의 전면 개편을 주장함. 반면 구주류와 일부 중도파는 이를 사실상 기존 민주당 세력을 배제하는 ‘인적 청산’과 ‘분당 시도’로 받아들임

 

4. 2차 충돌: 대북송금 특검 (2003년 2~3월)

경과

  • 2003년 2월, 대북송금 의혹 특검법이 민주당 의원 전원 불참 속에 한나라당·자민련 주도로 국회 통과 (찬성 158, 반대 1, 기권 3)
  • 동교동계는 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기대
  • 당내에서도 신주류는 '조건부 거부권', 구주류는 '수용 불가'로 갈려 혼선
  • 같은 해 3월, 노 대통령은 민주당 지도부의 거부권 행사 건의를 받고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원안 공포

결과

  • 특검 수사로 박지원 전 비서실장 등 김대중 정부 핵심 인사들이 줄줄이 사법처리
  • 동교동계와 반노 세력의 격렬한 반발
  • 당시 언론은 노 대통령의 특검 수용을 ‘영남에 대한 손 내밀기’로 분석하기도 함
  • 이 지점이 '호남 세력과 친노 세력 분열'의 실질적 분수령. 후단협이 감정의 앙금이었다면, 대북송금 특검은 정치적 결별의 명분을 만듦

 

5. 신당 논쟁: 갈등의 본격화 (2003년 5~7월)

구도

  • 신당파는 정동영·천정배·신기남 등을 중심으로 세를 확장했고, 반대편에서는 박상천 등 당 사수파와 조순형·추미애 등이 참여한 통합파가 분당 없는 통합을 주장함. 당시 당내에는 신당 참여파, 관망파, 통합파, 당 사수파가 동시에 존재할 정도로 복잡한 구도였음

신주류의 공세

  • 2003년 5월 민주당 워크숍에서 신당 추진이 공식 궤도에 올랐음
  • 5월 16일, 신주류 의원 67명이 '정치개혁과 국민통합을 위한 신당추진모임' 발족
  • 신주류 내부도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림
    • 강경파: 구주류와 결별하고 새로 가자
    • 온건파(김원기·정대철 등): 호남 기반 구주류를 도외시하면 내년 총선에서 참패한다

구주류의 반격

  • 한화갑 전 대표가 신당 불참 선언 → 신당 추진에 제동
  • 구주류는 조기 전당대회를 통한 당 개혁으로 맞대응
  • 6월, 구주류는 김원기·이상수·정동영·이해찬·천정배·신기남 등 6명을 '신당 6적' 으로 지목하고 출당 조치까지 검토
  • 분당 과정에서 민주당 잔류파는 노 대통령이 신당 창당을 사실상 지원하거나 최소한 방조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

교착

  • 신주류는 당무회의 표 대결, 구주류는 조기 전대. 양측이 서로 다른 기구로 승부를 걸며 분당이 가시화
  • 6월, 신주류는 막후 절충이 난항을 겪자 당 밖에 독자적 신당 추진기구를 만들기로 결정

외부 변수

  • 7월 7일 한나라당 개혁파 5인(김부겸·김영춘·안영근·이부영·이우재, '독수리 5형제') 탈당 → 신당 합류 흐름 형성

 

6. 분당 실행 (2003년 9~11월)

 

7. 분당이 만든 결과: 탄핵의 구조적 조건

① 헌정사상 초유의 '제3당 여당'

  • 열린우리당 47석으로 창당 (민주당 탈당파 40 + 한나라당 5 + 개혁국민정당 2)
  • 분당 시점 기준 새천년민주당이 60석 안팎으로 오히려 의석이 더 많았음
  • 즉 대통령이 소속된 당이 원내 제3당

② 야권의 압도적 다수 확보

  • 한나라당 + 새천년민주당 + 자민련 = 재적 3분의 2를 훨씬 넘는 규모
  • 탄핵소추 정족수(재적 3분의 2)를 구조적으로 충족 가능한 상태가 만들어짐

③ 감정적 조건까지 갖춤

  • 새천년민주당 입장: "대통령을 만들어줬더니 당을 깨고 나갔다"
  • 실제로 민주당은 노 대통령이 "희대의 배신을 했다"며 강력한 비난 성명을 냄
  • 총선을 앞두고 존재 증명이 절박했던 상황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총선을 앞둔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모두 위기

  • 한나라당: 2003년 불법 대선자금('차떼기') 수사로 지지율 급락
  • 새천년민주당: 대통령을 배출하고도 당에서 쫓겨난 듯한 상황 → 존재감 위기
  • 두 당 모두 총선을 앞두고 반전 카드가 필요한 상태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이 쟁점화

  • 2004년 4월, 제17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긴장이 고조
  • 노무현 대통령은 2월 기자회견 등에서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를 나타내는 취지의 발언을 함
  •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대통령에게 공무원의 선거중립 의무를 준수할 것을 요구
  • 야당은 대통령이 선거법상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고 주장하면서 사과를 요구
  • 노 대통령은 야당이 요구하는 방식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정국은 탄핵 이슈로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손을 잡고 탄핵안 제출

2004년 3월 9일

  •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
  • 탄핵안에는 국회의원 159명이 동의
  • 당시 탄핵 추진의 중심은 제1야당 한나라당과 노 대통령의 친정이었던 새천년민주당

탄핵소추 사유는 크게 세 가지로 제시됨

  1.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등 법질서 위반
  2. 대통령 측근 비리 등 정치적 책임
  3. 경제·국정운영 실패

 

3월 12일,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소추 가결

2004년 3월 12일

  • 국회 본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
  • 탄핵소추안이 의결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 권한은 정지됐고,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음

탄핵 직후의 반탄 역풍

탄핵소추안 의결 이후 정치권 밖에서는 탄핵에 반대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이어짐. 그리고 불과 한 달 뒤인 4월 15일 제17대 총선이 치러짐

 

제17대 총선 결과: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고, 탄핵에 참여했던 민주당은 크게 의석을 잃음

  • 열린우리당: 152석
  • 한나라당: 121석
  • 새천년민주당: 9석
  • 민주노동당: 10석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 기각: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탄핵소추를 기각. 헌재는 노무현 대통령의 일부 행위가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된다고 판단하면서도, 대통령직에서 파면할 정도로 중대한 위법이라고 보지는 않았음.

 

헌재가 제시한 핵심 기준은 다음과 같음

 

"대통령을 파면하려면 단순한 법 위반이 아니라, 대통령직을 유지시키는 것이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을 정도의 ‘중대한 법 위반’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즉시 직무에 복귀


그때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었나

 

김민석: 국민통합21에서 ‘남은 민주당’으로

  •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을 탈당해 정몽준 후보의 국민통합21로 이동
  • 2003년 11월 민주당 복당을 신청. 시점이 열린우리당 창당 직전
  • 따라서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는 친노 신당파가 아니라 기존 민주당 쪽에 위치
  • 2004년 총선에서는 민주당의 서울 영등포갑 후보로 출마했지만 탄핵 역풍 속에서 낙선
  • 당시 현역 국회의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탄핵 표결에 참여하지는 않았음

 

추미애: 노무현 대선을 도왔지만 민주당에 남다

  • 2002년 대선에서는 노무현 후보 측 국민참여운동본부를 이끄는 등 노 후보 당선에 적극 참여
  • 그러나 2003년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는 열린우리당 창당파를 따라가지 않고 새천년민주당에 잔류
  • 당시 조순형 의원과 함께 ‘통합모임’ 공동대표를 맡아 분당 없는 통합을 주장했고, 신당파를 비판함
  • 2004년 탄핵 국면에서는 처음에는 탄핵에 반대했으나 이후 민주당 당론에 따라 찬성 쪽으로 입장을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음. 추미애 본인도 이후 이를 자신의 정치 인생에서 크게 후회한 일로 여러 차례 언급함
  • 탄핵 역풍이 불면서 17대 총선에서 낙선했고, 이후 광주에서 삼보일배를 하며 사죄

 

송영길: 민주당 탈당 → 열린우리당 창당 참여

정청래: 노사모 출신.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참여 → 2004년 총선 마포을 첫 당선(득표율 44.8%)

유시민: 개혁국민정당에서 11월 3일 탈당 후 합류

정동영: 열린우리당 창당 주도, 열린우리당 의장, 탄핵 반대